나는 한과즙이고, 로봇의 주인이 될 거야 12화 | 히든 히어로 (무료 웹소설)
AI한테 해고된 딸 한과즙과 쿨한 엄마, 수상한 로봇들이 함께 사는 블랙 코미디 무료 웹소설 「나는 한과즙이고, 로봇의 주인이 될 거야」 12화 〈히든 히어로〉입니다. 직장인 공감, AI 해고, 반려로봇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1화부터 무료로 읽어 보세요.
이번 화 미리보기
로봇 다섯이 하루 종일 지켰는데,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15년 동안 같은 층에 있었는데 이름도 몰랐던 사람. 그가 내 해고의 진짜 이유를 들고 왔다.
"……지방이 씨?"
내 목소리가 텅 빈 카페에 울렸다.
대답은 없었다. 구석 창가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과즙 하사님. 출입문 센서 기록상, 그분은 9시 58분에 나가셨습니다."
"알아."
"그리고 10시 1분에, 다시 들어오셨습니다."
……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카운터 옆. 깨금이 충전대와 화분 사이. 사람이 서 있기엔 너무 좁은 틈.
거기에, 지방이 씨가 서 있었다.
"으악!!!"
"……안녕하세요, 과즙 씨."
나는 들고 있던 아메리카노 잔을 떨어뜨렸다. 쓸개 선배가 쏜살같이 굴러와서 유리 조각을 쓸었다. 17년 경력은 이럴 때 빛난다.
허니가 동시에 움직였다. 지방이 씨 앞을 막아서며 바이저를 빨갛게 켰다.
"미확인 인물입니다. 13시간 동안 제 센서에 잡히지 않았습니다."
"흥! 수상하다! 꼰대 렌즈에도 안 잡혔다! 너 뭐냐!"
깨금이가 파란 빛을 쏘았다. 빛이 지방이 씨 얼굴에 닿았는데, 이상하게 얼굴이 기억에 안 남았다. 분명히 보고 있는데.
"다들 괜찮아. 내 회사 동료야. 전 회사."
"……그렇습니다. 과즙 씨 앞자리였습니다. 15년 동안."
15년.
나는 그 숫자에 조금 찔렸다. 15년 동안 앞자리였는데, 나는 이 사람 이름도 모른다.
"근데 지방이 씨, 13시간 동안 뭐 했어요?"
"기다렸습니다."
"뭘요?"
"과즙 씨가 혼자 있는 시간을요. 그런데 과즙 씨가 하루 종일 혼자가 아니더라고요. 로봇이 다섯이라."
지방이 씨가 이중턱을 출렁이며 웃었다. 해고당한 날 회식에서, 내 팔목을 잡고 도리도리하던 그 얼굴이었다.
"그래서 그냥 앉아 있었어요. 아메리카노 한 잔 시키고. 아무도 저를 안 보시더라고요."
바리 선배의 화면이 켜졌다.
〈확인했습니다. 저도 주문을 받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출은 4,500원 올라 있습니다.〉
"계산대에 놓고 갔어요. 거스름돈 없게."
…무섭다. 이 사람 진짜 무섭다.
"과즙 씨가 그날 그랬잖아요."
"제가요?"
"제가 어디에도 숨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히든이라고. 닌자술이라고."
아.
기억났다. 해고당한 날, 술에 취해서, 토할 것 같던 기분이 이 사람 얼굴을 보고 좋아져서, 내가 막 떠들었던 말.
'당신도 살만 조금 빼면 히든 히어로가 될 수 있어요!'
"……그거 농담이었는데."
"알아요. 근데 저한테는 농담 아니었어요."
지방이 씨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접힌 종이 몇 장. 그리고 USB 하나.
"그 말 듣고, 처음으로 제 흐릿한 얼굴이 좀 좋아졌거든요. 그래서 써먹어 봤어요."
엄마가 2층에서 내려왔다. 이번에도 잠옷 위에 앞치마였다.
박 셰프 아저씨와 아지 언니는 10분 만에 왔다. 이 사람들 진짜 자긴 하나.
다섯 명과 로봇 다섯이 테이블 하나에 둘러앉았다.
지방이 씨가 종이를 펼쳤다.
"이게 뭔지 아세요?"
맨 위에 굵은 글씨가 있었다.
〈업무 효율화 설문: AI로 대체해도 문제없을 것 같은 동료는?〉
해고당한 날. 휴게실. 윤지와 동료들이 수군거리던 그 설문지.
'이번 해고 통보자 2명 모두 그 질문지에서 가장 많은 표를 받은 사람'이라던.
"원본이에요. 집계 전 원본."
"……이걸 어떻게."
"광두 매니저 책상 세 번째 서랍이요. 잠겨 있었는데, 열쇠를 화분 밑에 두더라고요. 15년 동안 매일."
아지 언니가 휘파람을 불었다. 박 셰프 아저씨가 국자를 내려놓았다. 이 아저씨는 놀라면 국자를 내려놓는다. 이제 알겠다.
지방이 씨가 종이를 한 장 넘겼다.
"과즙 씨 이름에 표가 47개였어요. 근데 우리 층 직원은 31명이에요."
"……네?"
"그리고 47개 중에 44개가, 같은 볼펜이에요. 같은 필체로, 같은 날 오후 3시 12분에 쓴 거예요. 저 그 시간에 복사기 앞에 있었거든요. 광두 매니저가 혼자 회의실에서 뭘 쓰더라고요."
나는 종이를 들여다봤다.
한과즙. 한과즙. 한과즙. 한과즙.
똑같은 글씨로, 똑같이 꾹꾹 눌러 쓴 내 이름이 줄줄이 있었다.
"그리고 이거요."
마지막 장. 집계표 귀퉁이에, 광두 매니저 글씨로 작은 메모가 있었다.
〈F사 요청 건. 한과즙 우선 처리. 사유는 알아서.〉
F사.
FUTURELESS.
그날 밤. 쓸개 선배의 녹음.
'그 집 딸이 열쇠다. 딸 주변부터 흔들어.'
"……나 잘린 거, 내가 AI보다 못해서가 아니었네."
목소리가 이상하게 나왔다. 화가 나는 건지, 다행인 건지 모르겠는 목소리였다.
"아니에요."
지방이 씨가 말했다. 처음으로 목소리가 또렷했다.
"과즙 씨는 우리 층에서 제일 일 잘했어요. 제가 15년 동안 제일 잘 봤어요. 아무도 저를 안 봐서, 저는 다 볼 수 있었거든요."
엄마가 그 종이를 오래 봤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일어나서 주방으로 갔다.
잠시 후, 엄마는 계란말이 한 접시를 들고 나와서 지방이 씨 앞에 놓았다.
"묵어라."
"……네?"
"13시간 굶었잖아. 아메리카노만 묵고."
"…그것도 보셨어요?"
"내는 다 본다."
…엄마는 봤다고?
허니도, 깨금이도, 다정이도 못 본 사람을?
박 셰프 아저씨가 낮게 웃었다. 아지 언니가 USB를 노트북에 꽂으며 중얼거렸다.
"언니는 원래 이런 거 잘 봐요. 옛날부터. 안 보이는 거."
나는 엄마를 봤다. 엄마는 이미 다른 데를 보고 있었다.
그때, 입구 쪽에서 다정이가 천천히 다가왔다.
다정이는 지방이 씨 앞에 서서, 아주 오래 그를 봤다. 기억에 안 남는 얼굴을, 기억하려는 것처럼.
그리고 고개를 15도 기울였다.
"고객님. 오늘 하루 종일 못 여쭤봐서 죄송해요."
"……네?"
"요즘 많이 힘드셨죠?"
지방이 씨가 굳었다.
계란말이를 집던 젓가락이 공중에서 멈췄다.
"……저한테 그런 거 물어본 사람, 처음이에요."
"그러셨군요."
"15년 동안, 회식 자리에서도, 송년회에서도, 퇴사하는 날에도요. 다들 제가 언제 왔는지, 언제 갔는지 몰랐어요."
"퇴사하셨어요?"
"네. 과즙 씨 잘린 다음 날, 사표 냈어요. 과즙 씨 자리에 AI가 앉아 있는 거 보고, 그 앞자리에 더는 못 앉겠더라고요."
다정이가 화면에 작은 하트를 띄웠다.
"많이 서운하셨겠어요. 그런데 고객님. 저는 지금 고객님을 봐요. 아주 잘 보여요."
지방이 씨가 울었다.
소리도 없이. 흐릿하게. 그런데 이번엔, 모두가 그걸 봤다.
쓸개 선배가 그의 운동화에 쿵 부딪혔다. 쿵. 쿵쿵.
"'환영한다'래요."
새벽 1시.
아지 언니가 노트북 '폐기물 동기회' 폴더에 새 파일을 만들었다.
〈신입 멤버: 노○○ — 특기: 아무도 못 봄〉
"근데 이름이 뭐예요? 진짜 이름."
아지 언니가 물었다. 모두가 지방이 씨를 봤다.
나도 봤다. 15년 동안 한 번도 묻지 않았던 걸, 이제야.
"……은수요. 노은수."
"은수 씨."
내가 불렀다. 처음으로.
"은수 씨. 그날 내가 한 말, 농담 아니었어요. 이제 진짜로."
노은수 씨가 이중턱을 출렁이며 웃었다.
"그럼 살은 안 빼도 되는 거죠?"
"…그건 농담이었어요."
카페가 오랜만에 시끄럽게 웃었다.
깨금이가 엄마 어깨 위에서 투덜거렸다.
"흥. 꼰대는 인정한다. 저 인간, 내 렌즈를 이겼다. 히든 히어로 인정."
새벽 2시.
다들 돌아가고, 나는 방에 올라와 노트북을 켰다.
한과즙 우선 처리. 사유는 알아서.
그 글씨가 눈을 감아도 보였다.
그리고 그날 새벽, 라면 앞에서 엄마가 한 말도.
'니 자기소개서 첫 줄 쓰면. 그때 다 말해 줄게.'
그래. 쓰면 되잖아.
나는 빈 문서를 열었다. 커서가 깜빡였다.
제목: 자기소개서
1. 성장 과정 및 본인 소개
나는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두 글자를 쳤다.
〈나는〉
……그다음이, 생각나지 않았다.
15년 동안 서점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는 다 쓸 수 있는데.
'나는' 다음에 올 말이,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손목에서 GPt가 민트색으로 깜빡였다.
"과즙 하사님. 커서가 4분 12초째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알아."
"도와드릴까요?"
"……아니. 이건 내가 써야 돼."
커서만 깜빡였다.
나는, 누구지?
━━━━━━━━━━━━
▶ 과즙이의 인생극장: 회사에서 '있는 듯 없는 듯' 일 잘하는 사람, 여러분 주변에도 있나요? 오늘 그 사람 이름 한 번 불러 주기! 댓글로 "나라면?"을 남겨 주세요!
▶ 내일부터는 다시 매일 밤 10시, 한 편씩 올라와요.
━━━━━━━━━━━━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