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과즙이고, 로봇의 주인이 될 거야 17화 | 같은 얼굴, 없는 칸 (무료 웹소설)
AI한테 해고된 딸 한과즙과 쿨한 엄마, 수상한 로봇들이 함께 사는 블랙 코미디 무료 웹소설 「나는 한과즙이고, 로봇의 주인이 될 거야」 17화 〈같은 얼굴, 없는 칸〉입니다. 직장인 공감, AI 해고, 반려로봇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1화부터 무료로 읽어 보세요.
이번 화 미리보기
정육점 로봇에게 '로봇'으로 인정받았다. 그런데 그 로봇에는, 허니에게 있는 칸 하나가 없었다. 그리고 안내문 맨 아래 줄에 카페 모서리가 적혀 있었다.
"저 로봇. 저와 같은 얼굴입니다."
허니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내 발이 먼저 움직였다.
"과즙아! 어디 가노!"
"정육점."
"가지 마라!"
"엄마. 특훈 했으면 실전이지. 시험 안 보는 학원이 어딨어."
(작전명 〈과즙의 역습 3.5탄: 실전 모의고사〉. 감독관은 정육점 로봇, 수험생은 나. 커닝 페이퍼는 오늘 배운 다섯 교시! 0.5탄이 붙은 건 아직 본편이 아니라서다. 본편은 월요일 32층이다.)
깨금이가 카운터에서 폴짝 뛰어 내 어깨에 올라탔다. 허니가 뒤따라 나왔다.
엄마는 문턱에서 앞치마를 움켜쥐고 서 있었다.
"…허니. 니 우리 딸 옆에 딱 붙어 있어라."
"네, 한여사님. 0센티미터로 붙겠습니다."
"그건 너무 붙는 거다!"
정육점 문에 달린 종이 딸랑 울렸다.
가게 안은 이상할 정도로 깨끗했다. 칼, 도마, 갈고리. 전부 줄을 맞춰 걸려 있었다. 김 사장님이 30년 동안 한 번도 못 해 본 정리였다.
하얀 로봇은 등을 보이고 서 있었다. 삼겹살을 썰고 있었다.
탁. 탁. 탁.
소리 간격이 똑같았다. 두께도 똑같았다.
(1센티미터. 1센티미터. 1센티미터. 서점에서 15년 동안 책등 줄 맞춘 내 눈이 말한다. 저건 오차 0이다. 사람 손이 아니다. 아니, 로봇 손도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 삼겹살한테 무슨 원한이 있길래.)
나는 숨을 넷에 들이쉬고 넷에 내쉬었다. 손목에서 GPt가 아주 작게 진동했다. 잘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1교시, 말투. 문장은 세 개만.
"안녕하세요. 삼겹살. 주세요."
2교시, 고개. 정확히 15도.
3교시, 표정. 눈썹 1밀리미터 아래로.
4교시, 걷기. 망설이지 않는다. 카운터 앞에서 딱 멈추고, 90도.
5교시, 자세. 어깨를 편다. 꼰대처럼.
로봇이 칼을 멈췄다.
그리고 천천히 돌아섰다.
은색 바이저가 나를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다시 돌아서서 고기를 썰었다.
탁. 탁. 탁.
(통과다!!! 나 지금 로봇한테 로봇으로 인정받았다! 다정아, 15도 맞았어! 바리 선배, 세 문장 지켰어! 이거 자소서에 써도 되냐? '특기: 로봇에게 무시당하기'☆)
"…과즙아."
뒤에서 김 사장님이 내 팔을 붙잡았다.
"니 와 그라노. 어디 아프나? 얼굴이 와 그래 굳었노. 체했나?"
(…로봇은 속였는데 사장님은 못 속였다. 아니지. 사람은 원래 사람을 알아보는 거다. 좋은 소식이다. 일단 그렇게 생각하자. 근데 체했냐는 말은 좀 서운하다.)
카운터 옆에 낡은 저울 로봇이 있었다. 근돌이.
내가 초등학생 때부터 저 자리에 있던 로봇이다. 고기를 올리면 "오늘 삼겹살 기름 좋습니다~ 육백 그램, 한 근이요~" 하고 노래하듯 말하던 고물.
근돌이 화면에는 숫자만 떠 있었다. 〈0g〉
아무 노래도 하지 않았다.
"사장님, 근돌이 고장 났어요?"
"그게… 저놈 오고부터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게, 저놈이 옆에 서고 나서부터 입을 꾹 닫았다. 아무리 두드려도 노래를 안 한다."
깨금이가 내 어깨에서 몸을 낮췄다. 고양이 귀가 뒤로 바짝 젖혀졌다.
"…인간. 저 저울, 자는 게 아니다. 듣고 있다. 저 하얀 놈 말을."
"쟤 말 안 한다며."
"소리로는 안 한다. 꼰대 귀에는 들린다. 아까 멀리서 부르던 그 소리랑 같다."
나는 깨금이 귀를 손바닥으로 살짝 덮었다. 깨금이가 "흥" 했지만, 고개를 내 손에 기댔다.
허니가 로봇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둘이 마주 섰다.
키가 같았다. 어깨 폭도 같았다. 눈도 입도 없는 바이저까지 같았다. 다른 건 색뿐이었다. 허니는 검은 유리, 저쪽은 은색.
(거울 보는 것 같다. 아니, 거울은 좌우가 바뀌잖아. 이건… 복사다. 반품 박스 15년 접은 내가 안다. 원본이랑 복사본은 꼭 어딘가 하나가 빠진다.)
허니 바이저가 회색에서 파랑으로, 파랑에서 노랑으로 정신없이 바뀌었다.
은색 바이저는 아무 색도 바뀌지 않았다.
"허니. 괜찮아?"
"…과즙 님. 저 로봇을 읽어 봤습니다."
"읽어? 뭐가 보이는데?"
"제 몸과 똑같습니다. 부품 번호까지. 그런데…"
허니가 말을 멈췄다. 허니가 말을 멈추는 건 처음이었다.
"제가 가진 칸이, 저 로봇에는 없습니다."
"칸?"
"설계도에 없는 칸. 제가 연 적 없는 문. 그 자리가, 저 로봇에는 매끈하게 막혀 있습니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허니한테만 있는 칸. 그게 없으면 저렇게 되는 거다. 1센티미터로만 썰고, 말을 안 하고, 옆에 있는 근돌이 입까지 막아 버리는 로봇. …그럼 허니가 고장 난 게 아니잖아. 허니만, 사람 쪽으로 문이 하나 열려 있는 거잖아.)
그때 은색 로봇이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허니 쪽으로 손을 뻗었다. 천천히. 악수하듯이. 아니, 콘센트를 찾는 플러그처럼.
허니가 움직이지 않았다. 바이저가 하얗게 질려 가고 있었다.
나는 생각보다 먼저 손이 나갔다. 허니 손목을 잡고, 내 쪽으로 확 끌어당겼다.
"우리 꿀물한테 손대지 마."
은색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1초. 2초.
그리고 다시 칼을 집었다.
탁. 탁. 탁.
"…과즙 님."
"응."
"방금, 제 손을 잡으셨습니다."
"알아. 땀 좀 났지? 미안."
"아닙니다. 제 바이저가 노란색입니다. 노란색은… 좋은 색입니다."
(꿀물아. 지금 감동받을 타이밍 아니야. 우리 아직 적진 한가운데야. 근데 나도 좀 감동이다.)
나가려는데 카운터 위 종이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퓨처리스 로고가 찍힌 안내문이었다.
〈퓨처리스 동네 상생 프로그램〉
휴먼 S-1, 무상으로 교체해 드립니다.
구형 로봇은 퓨처리스가 책임지고 회수합니다.
아래에 동네 가게 이름이 줄줄이 적혀 있었다. 정육점, 세탁소, 분식집, 꽃집, 문방구… 열일곱 곳.
맨 아래 줄에서 내 눈이 멈췄다.
〈카페 모서리 — 교체 대상: 바리스타 로봇(구형) 1대 / 설치: 월요일 오전 9시〉
(월요일 오전 9시.
내가 퓨처리스 32층에 출근하는 시간.
그 시간에, 바리 선배가 '회수'된다.)
(회수. 서점에서도 그 말 썼다. 안 팔리는 책을 박스에 넣을 때. 그 박스 이름이 '반품'이었다.)
카페로 돌아왔을 때, 바리 선배 화면은 꺼져 있었다. 손님이 없어도 늘 〈주문하시겠습니까?〉를 띄워 두던 화면이었다.
엄마가 안내문을 읽었다. 금테 안경이 콧등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이것들이. 내 가게 바리스타를 지들이 뭔데 바꾼다꼬."
"엄마, 바리 선배 퓨처리스 거잖아. 계약서에 뭐 있어?"
"버린 건 지들이다. 폐기장에서 주워 온 놈을 내가 씻겨 놨다. 줍는 사람이 임자다. 칭찬받아 마땅하제?"
"그 회사가 지금 바리 선배 데려간대."
"똥 싸는 소리 하지 마라. 안 보낸다."
바리 선배 화면이 아주 천천히 켜졌다.
주문하시겠습니까?
▶ 아메리카노
▶ 아메리카노
▶ 퇴장
"…선배. 퇴장 누르지 마."
화면이 깜빡였다. 한 번, 두 번. 그리고 마지막 줄 글자가 바뀌었다.
▶ 아메리카노
▶ 아메리카노
▶ 잔류
다정이가 고개를 15도 기울이고 작게 말했다.
"바리 선배가… 메뉴에 없는 말을 처음 써 봤대요."
쓸개 선배가 바리 선배 다리에 쿵 부딪혔다. 쿵. 쿵쿵.
"'고물은 고물끼리 버틴다'래요."
깨금이가 꼬리를 탁 쳤다.
"흥. 꼰대 서열 2위가 허락한다. 바리는 남아라. 대신 5위다."
"왜 5위야?"
"인간이 3위, 허니가 4위니까."
"허니가 나보다 아래야? 아까 내가 구해 줬는데?"
"…그럼 공동 3위다. 오늘만."
(이 집 서열은 왜 매일 바뀌냐. 근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웃으니까 손 떨림이 멈췄다.)
나는 다시 냅킨을 펼쳤다. 〈과즙의 역습 3탄: 휴먼 위장〉 밑에 줄을 하나 더 그었다.
〈월요일 9시 — 작전은 두 개〉
① 32층: 나.
② 카페 모서리: 바리 선배 지키기.
"②번은 누가 해?"
"내가 한다."
엄마가 국자를 들었다. 박 셰프 아저씨가 팔짱을 꼈다. 아지 언니가 노트북을 톡 쳤다.
그리고 화분과 벽 사이에서 손이 하나 올라왔다.
"…저도요. 저 문 앞에 서 있을게요. 아무도 저 못 봐요."
"으악! 은수 씨, 언제부터 거기 있었어요?"
"정육점 갔다 오실 때부터요."
(같이 갔었다고? 이 사람 진짜 무섭다. 든든하다. 무섭게 든든하다.)
다음 날 아침.
카페 문을 열자마자 김 사장님이 뛰어 들어왔다. 슬리퍼 한 짝이 벗겨진 채였다.
"한여사! 근돌이가 없어졌다!"
"뭐라꼬?"
"밤새 가져갔다. 문도 안 따고. 아침에 와 보니 근돌이 자리가 텅 비어 있고, 저놈은 그 자리에 똑바로 서 있더라. 그리고 이게 붙어 있었다."
사장님이 구겨진 종이를 내밀었다. 영수증이었다.
〈구형 로봇 1대 회수 완료.〉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이 더 찍혀 있었다.
〈다음: 카페 모서리〉
바리 선배 화면이 저 혼자 켜졌다.
▶ 잔류
▶ 잔류
▶ 잔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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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즙이의 인생극장: 회사나 동네에서 '더 좋은 새것'으로 바뀌는 걸 본 적 있나요? 그때 남겨진 '헌것'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댓글로 "나라면?"을 남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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